출근길, 조지 플로이드의 장례식 건조한 일상

코로나 시대의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나는 긴 출근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무심코 라디오를 켰다. 항상 듣는 89.3 메가헤르츠. 그런데 기대하던 시사대담 대신에 음악이 흘러나온다. 낯선 흑인영가(African-American spirituals)다.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무방비 상태로 콧잔등을 얻어맞은 것처럼 희미하게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오전 9시 18분. 모르긴 몰라도 이 시각에 이런 기분이 된 것은 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왜 뉴스 채널이 음악을 틀어주고 있는지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휴스턴의 한 교회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46살짜리 거구의 흑인은 고향(그는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지만, 아주 어릴 적 휴스턴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고향이나 다름없다고 진행자가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미니애폴리스의 길거리에서 8분 46초 동안 목이 눌려 고통스러워하다 숨을 거뒀다. 그에게는 6살짜리 딸이 있었다. 노모는 2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녀는 아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엄마를 목놓아 불렀다는 사실을 (다행히도) 알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충혈된 눈을 왼손으로 꾹꾹 누르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는 신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특히 흑인영가를 아주 좋아한다. "여보, 지금 NPR 틀어 보세요." 아내는 의아해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 약간 더 신나는 템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celebration'. 라디오 진행자는 셀레브레이션, 이라는 단어를 분명한 발음으로 문장에 넣어 여러 번 말했다. 인간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신나는 음악으로 '셀레브레이션'할 수 있을 때까지, 이들은 얼마나 많은 감정을 꾸역꾸역 삼켜 왔을까. 백인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아시아인 이민자로서 이런저런 혜택을 누리면서 이곳에서 생활해 왔다. 물론 불리함도 많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경찰관과 이야기할 때 "어쩌면 지금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다.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 사랑해.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전화해 준 게 너무 고마웠어."

아마 이런 소소한 행복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대로 운전해서 회사에 도착하면 꽤 널찍한 내 자리가 있고,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나를 반겨 주는 아내와 5개월짜리 딸이 있다. 잘 정돈된 부엌 한켠에 자리한 냉장고에는 우유와 달걀과 각종 채소와 맥주가 가득하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조지 플로이드는 이제 이런 소소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이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이 그에게서 그 소중한 것을 강제로 빼앗았다. 나는 '조지'라는 이름을 나지막히 읊조리며, 오늘 아침의 이 기분을 글로 적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언젠가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는 인종주의가 꿈틀거릴 때, 불에 덴 듯이 '조지!'라고 외치며 스스로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내게 남은 얼마의 시간이나마 그렇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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